숲에도 눈이 내린다
작성일 : 17.12.22   조회수 : 1327

숲에도 눈이 내린다



잎을 떨군 나목(裸木)들 키만큼 산이 낮아졌다. 무성한 잎들이 무장해제하자 감추어졌던 본래의 산 등고선이 ‘나 여기 있다’고 손짓하며 민낯을 드러낸다. 우선 반갑고 시원하다. 푹신한 낙엽을 만든 나무들도 홀쭉하게 보인다. 백 일 동안 묵언수행에 들어가는 조금은 비장한 표정이다. 겨울의 휴지기(休止期)를 보낼 준비가 다 된 것이다. 작은 것이 아름답다고 했다. 낮아진 큰 산이 포근하게 안기는 듯 가깝다. 지난여름 사나운 녹색의 위세는 간곳없다. 숲의 신선한 겨울 풍경이다. 나무들 사이로 열린 넓은 공간이 끝 간 데 없이 광활하게 다가온다. 적막할 뿐이다. 동면에 들어간 산짐승들도 갑자기 궁금하다. 산새 소리도 끊겼다. 태곳적부터 불던 원시의 바람만 반긴다. 겨울 한철까지 부지런을 떠는 사람만이 자연에 역행하며 홀로 서 있다. 눈 우산을 쓴 소나무, 잣나무, 주목들은 겨울을 지키는 초병(哨兵)처럼 변하지 않고 더욱 푸르르다.  

 

숲에도 눈이 내린다. 도회지의 눈처럼 계엄령이 내리듯 몰래 오지 않고 자연의 의식(儀式)처럼 자연스럽다. 이곳에서는 폭설도 그렇게 큰 의미가 없다. 해납백천(海納百川)하는 바다같이 모든 것을 품어 주는 산들이 있기 때문이다. 산들이 하얀 고깔을 썼다.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제국의 통일은 이렇게 하는 것이라고 눈 이불을 덮고 시치미를 떼고 있다. 계곡을 감추고 바위까지 눈으로 덮은 산등성이도 부드러운 곡선을 뽐낸다. 설원(雪原)에 부딪혀 꺾인 햇살이 눈을 찌른다. 애지중지 기르는 자작나무들의 하얀 몸통에 반사된 빛인지도 모른다. 

 

그 빛들은 몇 년 전 설날에 찾은 바이칼 호수에서 경험했다.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떠난 시베리아 횡단열차가 사흘 동안 달려 온 이르쿠츠크역의 온도계는 영하 35도를 가리켰다. 기차가 삶을 느리게 살라고 하지 않아도 자연의 일부가 되어 눈 덮인 자작나무 숲과 시베리아의 달빛에 젖었다. 바이칼 호수는 하얀 산까지 아우른 무지막지한 고독에 포박된 원시의 설국(雪國) 그 자체였다. 신령한 민족의 시원(始原)인 거대한 자궁에 예의를 표했다.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, 진흙에 더럽혀지지 않는 연꽃처럼 어디에도 걸림이 없는 광대무변(廣大無邊)이었다. 가없는 빙판에 반사되는 별들의 폭포도 금방 얼어붙었다.


 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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이르쿠츠크에서 바이칼 호수 가는 일곱 시간의 버스 여행길에 만난 눈 속의 자작나무 숲 

 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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한겨울 1월의 바이칼 호수세계 4번째 큰 호수를 얼음이 덮었다광대무변 설원의 절대 고독에 나는 누구인가를 되새겨 본다


그때의 데자뷔처럼 두껍게 얼음으로 덮인 수목원의 넓은 호수 위를 거닌다. 지금 물 위를 걸을 수 있는 겨울의 마법이 펼쳐진다. 여름날 물의 제국이었던 이곳의 빗장이 쉽게 열렸다. 발밑에 잠든 수련꽃들이 상하지 않을까 걱정하고, 겨울잠을 자는 금잉어들이 깰까 봐 조심조심 걷는다. 《주역》 곤(坤)괘의 이상견빙지(履霜堅氷至)의 계절이다. 겨울의 시작으로 서리를 밟은 것이 엊그제인데 지금 꽁꽁 얼어붙은 얼음 위에 서 있다. 그리고 동지(冬至)로 치닫고 있다. 곧 일양내복(一陽來復)의 새해를 준비해야 한다. 은미(隱微)한 변화도 신중하게 생각해 향후의 일을 미리 대비하라는 뜻으로 읽을 수도 있겠다. 그러나 그 근본으로 선(善)을 쌓으면 반드시 좋은 일이 생긴다[積善之家必有餘慶]는 가르침은 3천 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유효하다. 

   

수목원의 또 다른 모습이 앵글에 담긴다. 호수 한가운데 서서 주변 나무들과 문인석들의 열병을 받는다. 시각 교정은 쌓일수록 더욱 입체적이 된다. 무인기를 띄워 비싼 비용으로 찍었던 영상보다 손으로 만질 수 있는 지금 풍경이 훨씬 마음에 와 닿는다. 호숫가에 방한 비닐을 두껍게 뒤집어쓴 배롱나무들에게 인사를 전한다. 한두 해만 더 이런 고행을 하면 겨울바람에 얼어 죽지 않고 이 자리에 뿌리를 내려 한여름 위대한 붉은 꽃을 피울 것이라고 격려한다. 남쪽 고향에서 가져오고 싶었던 배롱나무 꽃그늘 숲의 꿈을 여기에 이루겠다는 나의 욕심을 들키지 않았으면 싶다.

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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나남수목원의 겨울 반송밭은 세한도(歲寒圖)처럼 겨울에 더 푸르다호숫가에 방한 비닐을 뒤집어 쓴 배롱나무가 겨울을 지나고 있다. 
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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 삼칸 정자 머리에 얹은 현판 인수전(仁壽殿)은 어질게 살아보겠다는 그 뜻이 마음에 들어 글쓴이도 모른 채 인사동에서 구입했다. 

 

도회지의 눈들은 잠시라도 더러운 탐욕까지 덮어야 한다지만 숲에서는 깨끗한 자연 그대로 쌓이면 된다. 어쩌면 눈빛에 묻힌 하얀 산새가 지나갔는지 모른다. 그리고 다시 혼자다. 오탁번 시인의 〈순은(純銀)이 빛나는 이 아침에〉를 여기에 초대해야 한다. 그이가 50년 전 스물다섯에 쓴 〈중앙일보〉 신춘문예 당선작이다. 지금도 그의 순수(純粹)는 찬란하게 숲의 순수로 빛나고 있다. 

 


눈을 밟으면 귀가 맑게 트인다. 

나무가지마다 순은의 손끝으로 빛나는

눈 내린 숲길에 멈추어 선

겨울 아침의 행인들.


원시림이 매몰될 때 땅이 꺼지는 소리,

천년동안 땅에 묻혀

딴딴한 석탄으로 변모하는 소리,

캄캄한 시간 바깥에 숨어 있다가

발굴되어 건강한 탄부의 손으로

화차에 던져지는,

원시림 아아 원시림

그 아득한 세계의 운반(運搬)소리.


이층방 스토브 안에서 꽃불 일구며 타던

딴딴하고 강경한 석탄의 발언.

연통을 빠져나간 뜨거운 기운은

겨울 저녁의

무변(無邊)한 세계 끝으로 불리어 가

은빛 날개의 작은 새,

작디 작은 새가 되어

나무가지 위에 내려 앉아

해뜰 무렵에 눈을 뜬다.

눈을 뜬다.

순백의 알에서 나온 새가 그 첫 번째 눈을 뜨듯,


구두끈을 매는 시간만큼 잠시

멈추어 선다.

행인들의 귀는 점점 맑아지고

지난밤에 들리던 소리에

생각이 미쳐

앞자리에 앉은 계장 이름도

버스 · 스톱도 급행번호도

잊어버릴 때, 잊어버릴 때,

분배된 해를 순금의 씨앗처럼 주둥이 주둥이에 물고

일제히 날아오르는 새들의 날개짓.

지난밤에 들리던 석탄의 변성(變成)소리와

아침의 숲의 관련 속에

비로소 눈을 뜬 새들이 날아오르는

조용한 동작 가운데

행인들은 저마다 불씨를 분다.


행인들의 순수는 눈 내린 숲 속으로 빨려 가고

숲의 순수는 행인에게로 오는

이전의 순간,

다 잊어버릴 때, 다만 기다려질 때

아득한 세계가 운반되는

은빛 새들의 무수한 비상(飛翔) 가운데

겨울 아침으로 밝아가는 불씨를 분다.

 


 

이 글의 일부는 2017년 12월 14일 〈한국일보〉의 '삶과 문화' 칼럼에 기고하였습니다.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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